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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재희
Jane Do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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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영업
Love you Jane Doe.
ㅤㅤ누디 립스틱을 칠한 내 얼굴은 참 우스꽝스러워. 담배와 향수 쩐내 가득한 펜실베이니아의 클럽 <차밍 치즈>에서 나는 처음 가발을 썼지. 내가 맨 처음 썼던 가발은 금발이었는데, 빌어먹을 아일랜드계 게이 하나가 비웃지 않겠어? 눈썹은 검은데 금발 가발을 쓰니 꼭 일본 창녀 같다고. 억울해. 걔 가발은 무려 핑크색이었단 말이야! 수염 자국이 거뭇한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 다신 차밍 치즈에 가지 않았다면, 물론, 내 인생에는 다행이었겠지. 하지만 난 그날 밤 그 년이랑 잤어. 썩은 치즈같은 금발 가발 쓰고서 말이지.
ㅤㅤ그건 아주 비극이었어. 왜냐하면 그전까지 내 이름은 제인 도가 아니었거든. 거지 같은 존 도였지. 혹은 종희 도였거나. 딱히 비밀도 아니지만 나는 그 이름들이 매우, 매우, 매우 싫어. 하여튼, 나는 결국 핑크 가발 쓴 아일랜드 게이랑 5개월 동안 떡치는 사이로 지냈고…… 그 말라깽이 인종차별주의자와 헤어지면서 대마와 코카인을 배웠어. (아, 이건 내 친구한테 비밀이야.) 다들 내가 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에서 자퇴한 줄 알지만, 사실은 퇴학당한 거야. 나는 1년간 차밍 치즈의 퀸이었고, 다운타운의 아파트에서 거의 매일 파티를 열었고, 인스타와 트위터의 비밀 계정에 내 드랙퀸 사진을 올리고 끝내주는 인기를 누렸지. 수업에는 나가지도 않았어. 1년 365일 내내! 밤새 압생트를 마시고 뻗은 어느 날 아침 결국 두 통의 전화가 걸려왔어. 학교의 퇴학 통지와 아버지의 최후 통첩 말이야. 둘 중 뭐가 더 최악이었을지 상상이나 돼?
ㅤㅤ하지만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내 주민등록증에 빨간 줄이 그어진 이야기를 해야 하거든. 온몸의 털을 싹 다 제모하고(삭발한 내 모습은 끔찍했지만, 그래도 난 여전히 예뻤지.) 검색대를 통과했지만, 글쎄, 귀국 일주일 전에 대마를 피웠던 게 원인이었을까? 결국 나는 입국과 동시에 엉덩이가 화끈한 경찰의 손에 이끌려 유치장에 처박혔지. 그런데 맙소사, 아버지가 찾아오신 거야. 언제나처럼 근엄하고 권위적인 표정이셨어. 그가 턱을 당기고 미간을 좁히면 마치 대부의 말론 브란도 같아. 내 아버지지만 참 섹시하다니까. 내 예쁜 얼굴과 끝내주는 몸매가 누굴 닮았겠어? 세상에, 그 시끄럽고 냄새나는 경찰서에 아버지가 묵직한 구둣발로 걸어오는데, 모두의 이목이 쏠리고 유치장은 고요해졌지. "내 아 어디 있나?" 순식간에 장르가 바뀌더라니까. 마리오 푸조가 우리 아버지를 봤어야 해. 헐리우드는 대체 우리 아버지를 놔두고 뭐하는 거람?
ㅤㅤ계속해서, 아버지는 내 인생을 말아먹은 죄를 짤막하게 성토하더니(그 목소리마저 치명적이었어. 얼굴도 본 적 없는 친엄마가 아버지와 결혼한 이유를 알 것만 같아.) 그야말로 대부처럼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했지. 어떤 내용이었냐면, 다시 굿 보이로 돌아간다면 내가 집행 유예를 받을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거야. 아침 6시면 방 침대에서 눈을 뜬 후 꼬박꼬박 아침밥을 챙겨먹고, 명석한 두뇌로 아이비리그 입학을 다시 준비하거나 정 여의치 않으면 국내의 여느 같잖은 대학이라도 들어가서(그의 문화 사대주의가 강하게 느껴지는 대목이지?), 다시 한번 밝고 희망찬 미래와 내일을 단란한 가정의 품에서 그려보자는 제안이었지. 그야말로 달콤한 크림과도 같았어. 나는 바보가 아니야. 내가 어떻게 그런 걸 거절하겠어? 감옥에 가서 좋은 점은 군대에 안 가도 되는 것뿐이라고! 나는 들떴지. 신도 났어. 한 번도 느낀 적 없었던 부성애마저 잠깐 느껴졌다니까. 역시 저를 사랑하시는 거죠? 눈물을 양동이째로 쏟으면서 차갑고 딱딱한 면회실 바닥에 무릎을 꿇으려는 순간이었어.
ㅤㅤ"근데 아부지, 제가 집행 유예를 우예 받는데요?"
ㅤㅤ"변호사가 초범이니까 정신병 있음 된다 카드만. 서류 이미 다아 해놨다."
ㅤㅤ"저… 정신과에 간 적이 없는데……."
ㅤㅤ말했지? 나는 바보가 아니라고. 아버지가 어떻게 그 짧은 시간 안에 아무 증거 없이 내 진단서를 떼올 수 있었겠어? 열쇠는 바로 내 비밀 SNS 계정에 올린 사진들이었어. 치렁치렁한 금발 가발을 쓰고, 밍크 목도리만큼 굵고 긴 인조 속눈썹을 붙이고, 분장에 가까운 화장을 하고 찍은 사진들 말이야. 그게 내가 미쳤다는 증거지! 나는 아버지가 그걸 찾아내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 역시 우리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는 게 분명하지? SNS라고는 마케팅 팀 발표 때나 좀 주워들었을 중늙은이가 어떻게 비공개 계정까지 알아냈을까. 나는 그 부성애에 뒷통수가 뻐근해질 만큼 감명받았어. 이빨 뽑은 꼬마처럼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웃었지.
ㅤㅤ"Fxxk you, Daddy. My name is Jane Doe."
ㅤㅤ알아? 나는 여자가 되고 싶었던 게 아냐. 평범하게 결혼도 하고 천년만년 벽장 게이로 살 수도 있었어. 하지만 나는 엿 같은 펜실베이니아에 가고 싶지 않았어. 나는 경제학과 금융을 공부하고 싶은 마음도, 내 이름 하나 똑바로 발음하지 못하는 영미권 머저리들과 지내고 싶은 마음도, 아버지의 증권 회사를 약간은 불법적인 방식으로 잇고 싶은 마음도 없었어. 이게 바로 내가 존 도의 이름을 선택한 이유지. 검시관을 제외하면 아무도 내 이야기를 궁금해하지 않아. 죽여주게 섹시한 내 아버지마저도! 누가 이런 나를 보고 시체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어?
ㅤㅤ마약사범으로 깜빵에서 8개월을 사는 동안 아버지는 단 한 번도 면회를 오지 않았어. 출소 후 개명할 때도 아무 연락 없었지. 그런데 내가 어딘가에 자리를 잡으려고만 하면, 꼭 집을 구해주는 거야. 이제는 알겠어. 우리 아버지는 아들을 끔찍이 사랑해, 내가 아니라. 내가 코카인을 끊든 구글에 입사하든 여자랑 떡을 치든 그 사실은 달라지지 않아. 그게 7년 만에 재회한 친구와 술잔 기울이자마자 대뜸 이 말을 했던 이유야.
ㅤㅤ"나 게이야. 한 달에 한 번은 여장하고 드랙 파티에도 가."
My name is Jane Doe.
Love you Jane Doe.
옅은 홍채와 머리카락
예쁘장한 동안에 육중한 몸
도톰한 입술과 풍성한 속눈썹
주말에만 바르는 매니큐어
광안리 맛집 <Cheese Jane> 운영
전과자(마약사범)
마사지기능사 자격증(복역 중 취득)
깔끔한 표준어 말씨와 억양
가끔 터지는 진해 방언
열 살 터울 이복동생 도태희, 도준희(쌍생)
개명 전 이름 도종희
89.11.21 기사년 뱀띠
자기파괴적 자기애와 자기연민
코카인
너는 행복해야지, 밝은 곳에서.